티스토리 뷰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최초로 간암 수술을 성공, 북한 최초의 의학 박사이자 김일성대 의대 외과대 강좌장이었던 장기려 박사는 바보 의사로 유명합니다. 성공한 의사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그는 왜 바보의사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살펴봤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의사 성산 장기려

장기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의사라면 촉망받는 인재임에 틀림없었을텐데요, 그는 좋은 대학병원 자리를 거절하고 가난한 농촌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연합기독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성산 장기려

농촌 사람들이 특별히 가진 것이 없었던만큼 돈을 받지 못하고 진료를 이어나가면서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월급을 털어서라도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가족들은 모두 남겨둔 채 차남 장가용만 데리고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한국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네요. 부산에서 그는 무료진료소인 복음병원을 설립해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무료로 계속 진료하다보니 운영에 차질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그러던 중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못하던 한 환자의 하소연을 들은 장기려 박사는 '밤에 문을 열어 줄테니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라며 환자의 딱한 사정을 헤아렸습니다. 돈만을 생각한다면 범죄에 가까운 짓이지만, 장기려는 자신이 손해보더라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후 1968년 장기려 박사는 한국 최초로 국민건강보험의 효시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고 19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1981년에는 한국 적십자사 인도상, 1985년 라이온스클럽 사회봉사상을 받는 등 빛나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자신이 교만해질 것을 우려하여 이후에는 그 어떤 상도 받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서울 백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의사였음에도 평생의 헌신과 이웃 사랑으로 그가 남긴 재산은 부산고신의료원 옥상의 24평 집 한 채가 전부였습니다.

장기려 옥상 집

옥상이라 여러모로 불편했을텐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본보기로 현재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의사 성산 장기려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대부분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향해 달려가는데 장기려 박사의 삶을 보니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댓글